현재의 교육은 기억과 이해 수준이다. 즉 어떤 지식을 기억하는 암기식 주입식 교육인데, 주사기로 인체에 약물을 주입하는 것과 같다. 아무런 노력없이 너무 쉽게 생각도 안 하고 정해진 것만 달달달 외워서 그것을 쓰는 실정이다.
책이란 것은 수많은 인간들의 생각이 집합된 글의 모임이요, 이런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은 오만 가지 생각을 할 수 잇다는 뜻이며,
네모난 방 안에 재화를 쌓아 놓듯이
곡간에 쌀가마니를 들여 재 놓듯이
머리에 수많은 쓰레기들이 쟁여 있는 것인데, 잡동사니가 많으면 많을수록 학자라 한다. 즉 제 생각이 아닌 남의 생각만 담았으니 너저분하기가 이룰데 없다. 백인의 단순함이 여실히 드러나 실체다. 어떻게 교육하는지 방식을 모르기 때문이다.
동방성현이신 공자는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했다. 배운다는 것은 기억하고 이해를 하는 것이다. 익힌다는 것은 깨친다는 것이다. 물미가 트인다는 것이다. 궁리가 통한다는 것이다. 동양의 공부는 오래하면 문리가 트여 선성후성이 기개일야라 했다.하여, 백인의 공부 방식도 박사과정까지는 주책도 없이 따라가다가 무얼 하나 건져서 논문내서 교수된다는, 그럴싸한 과정을 설정해 놓았는데 교수에 석학돼도 오십보 백보이니 기억과 이해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익힌다는 것은 실천력이다. 오늘 내일 그것을 끊임없이 실천하면서 터득해가는 것이다. 오십보 백보라는 것은 공자님 이후는 공자님만한 이 없고, 석가님 이후는 석가님만한 이 없고,예수님 이후는 예수님만한 이 없다는 것이다. 또 내 속의 전지전능한 잠재능력을 이 시대의 학문 수준으론 볼 수도 없다. 왜? 급변하기 때문에 실제와 학문의 거리만 멀어져간다. 즉 어제의 학문으론 오늘의 기술에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잠자는 순간에도 기술의 물은 흘러 벌써 저만큼 갔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이 시대의 학문은 기억과 이해 수준의 학문이다. 이것이 지식 기반으로 펼쳐져 있고 기계화 산업인데,
오행상 수이며, 많은 사람들의 지식으로 이루어 졌다. 기술서이며 이 글을 읽어 통하면 지혜가 샘물처럼 흐르는데 이와 같은 책이 안 나왔다. 나오면 기술의 완성이다. 노자의 도덕경을 참조해야 한다.
오행상 목의 학문은 사서삼경이며, 이 글을 읽어 통하면 인이 저절로 싹튼다. 송백이 청청이다.
오행상 화의 학문은 인도의 예언서, 우리나라의 정감록 격암유록 성경 등이며, 이 글을 통하면 사랑이 충만된다.
오행상 토의 학문은 각종 돈 버는 법, 부자되는 법, 요리하는 법, 통일교 법전 등인데 이와 같은 책을 통하면 믿음 있는, 신용 있는 사람이 된다.
오행상 금의 학문은 팔만대장경이며, 현재의 법전 법리이며, 이 글을 읽어 통하면 의리와 조리 사리 자비가 생긴다.
상화의 학문은 제자백가서, 병법서, 중용론(현존하는 세상의 가장 으뜸 학문임)인데 통하면 다재다능해진다.
인간들이 쓴 책(글)을 읽지 않아도 통하는법:
수는 짠맛만 먹으면 지혜가 바다와 같고 우주와 같고
목은 신맛만 먹으면 어진 것이 청청한 창공과 같고 초목과 같고
화는 쓴맛만 먹으면 밝은 것(예절)이 대낮과 같고 환한 태양이 중천에 떠오른 것과 같고
토는 단맛만 먹으면 너무나 확실하고 철저하여(신용) 바늘 끝도 들지 않는 옹고집이 되며
금은 매운맛만 먹으면 가로 세로 사각이 뚜렸하여(의리) 서슬이 시퍼렇게 일어나 절대 옳음과 절대 그름을 명확하게 양단하고
상화는 떫은 맛만 먹으면 목 화 토 금 수를 자유자재 구사할 수가 있으니(능력) 천재 중의 천재요 초능력자다.
이 여섯을 하나로 하면 여섯가지 욕심이 보이고, 욕심을 조절하여 하나로 하면 잠재능력이 보이고, 잠재능력으로 세상을 보면 통하지 않는 게 없다. 우주를 보면 우주와 화통하고, 지구를 보면 지구와 통하고, 인간을 보면 인간에 통하니, 두루두루 보면 우주 지구 인간이 하나다. 인간은 생명이 있으므로, 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 인간의 교육이니, 지금까지의 교육방식을 잊어버리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단지 자연의 원리를 기억하고 이해하고 깨치고 느껴서 실행하면 된다. 이것이 지상 최고의 학문인 것이다.